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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
전통 유도근원의 시원(始原)은 조선이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3차례이며 정확한 유도 어원과 신체기법의 묘사는 1598년 6월 22일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의 국란이 있었다. 즉 임진왜란은 1592년 5월 23일~1598년 12월 16일까지이다.
1598년 6월 22일 《조선왕조선조실록》 원전기사에는 전통 “유도” 어원과 신체기법의 문헌 등장하는데 "유도제지사(柔道制之使)"와 "유능승강자(柔能勝强者)" 어휘이다.
이것은 일본의 1637년 진신류 유도(真信流柔道)의 어원 보다 우리나라가 약 39년 정도 더 빠르다. 이는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전쟁에 승리로 이끈 이덕형에 의해 《조선왕조선조실록》에 맨 처음 유도의 어원과 신체기법의 묘사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선조실록》 101권, 선조 31년 1번째기사 1598년 6월 22일 내용이다. 즉 이 내용에는 우의정 이덕형이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이루면서 일본의 왜적을 승리할 수 있는 군사적 병법인 우리 조선군사가 유도의 신체기법 병법을 가지고 있다는 원전기사 내용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외간(外間)에서는 연일 유언비어가 은밀히 전파되고 있는데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보병(步兵)이 호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표병이 무기를 가지고 각자 호위하고 있다.’ ……(중략)…… 예로부터 성급하고 사나운 적병을 다루는 데는 그 방법이 여러 가지 있는데 방책(方冊)에서 상고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먼저 유도(柔道)를 사용하여 상대를 제압하고 또 교만하고 분개하는 기운으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보고서 차츰 굴하게 만든 연후에 방법을 강구하여 몰아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석공(黃石公)이 이른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 (유능승강 柔能勝强)’고 하였기에 참으로 지극히 긴요한 요지인 것입니다. ……(중략)…… 항차 왜노(倭奴)가 파견한 첩자들의 이목(耳目)이 여기저기 퍼져 있으니, 사세로 보나 도리로 보나 결코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략)…… "밖에는 왜적이 있고 안에는 간적(姦賊)이 있는데 적당(賊黨)의 수효 또한 많으니, 천하의 일이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하였다.
이처럼 조선군사들은 일본 왜적과 7년 전쟁을 하면서 갑주를 착용하고 칼과 조총을 가지고 있는 왜적에게 대처하는 각력상쟁인 육박전, 즉 적병에게 급소부위를 칼과 손으로 잡고 지르고, 던지고, 메어치고, 누르고, 꺾고, 포박하는(란포(亂捕), 란투(亂投), 란취(亂取) 등 "유도제지사(柔道制之使)"와 "유능승강자(柔能勝强者)" 병법을 완성하여 승리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우의정 이덕형과 이순신 그리고 조선군사의 임진왜란 업적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이덕형 그는 1595년 경기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 4도체찰부사가 된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 방어를 강화하게 했다.
이 해에 우의정에 오른 뒤 다시 좌의정으로 승진한다. 또한 우의정 이항복의 진언으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합동으로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ㆍ강원도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에 힘썼고, 다음해 영의정이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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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선조실록》 101권, 선조 1598년 6월 22일 "유도제지사(柔道制之使)"와 "유능승강자(柔能勝强者)" 고유 전통 “유도”에 관련된 원전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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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선조실록》 101권, 선조 1598년 6월 22일 일본 왜적에 관한 대책 강구 원전기사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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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선조실록》 101권, 선조 1598년 6월 22일 일본 왜적에 관한 대책 강구 원전기사 2 |
이후 일본으로 유도가 전래되었다는 것은 1637년 진신류 유도(真信流柔道)의 기원을 보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더욱 많은 유파형성하게 되며 발전된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후 1906년 조선유술부의 시작은 상무적 기풍인 구국의 일환으로 고종황제와 월남 이상재선생 100명 장사(무사) 그리고 고종황제무관학교 출신인 류근수선생과 나수영선생에 의해서 조선유술부가 시작된다.
하지만 1882년 창설된 가노지고로(嘉納治五郎)의 일본 강도관 유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또 1898년 고종황제가 무관들을 파견하여 일본유술과 검술을 조사하고 1906년 빨리 귀국하라는 내용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고유 전통유술과 유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월남 이상재선생이 앞장서고 일본유도를 재패한 조선유술의 달인인 나수영선생에 의해서이다.
이를 종합하면 유도의 근원은 조선이며 구국일환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유술부”를 “대일본제국 강도관 유도 조선지부”로 강압으로 편입시키는 만행에 의해 해산된다. 이로 인해 김홍식 선생만 경성에 남고 나수영선생과 제자들은 대한독립운동을 하고자 만주로 간다.
특히 kbs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기밀문서에는 “1920년,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김좌진 36세 총사령관, 특기는 유도(유술)이며 신장은 6척 1촌이고, 얼굴은 타원형이다. 또한 이범석장군 등 독립군 간부들의 개인별 특징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특히 용인대학교 전신인 대한유도학교 초대 교장인 이범석장군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번 유도의 근원에 관한 발견은 이범석장군, 김홍식선생, 이제황선생과 남종선선생과 유도지도자 및 학자 그리고 유도서적 등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도가 넘어 갔다는 구전으로 수없이 언급했으며 이로 인해 수년간 연구와 조사 끝에 그 단초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숭고한 상무정신이 없었으면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더욱 고유 전통유술과 유도를 계승 발전 시켜야 할 것은 후손들의 몫이며 사명인 것이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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