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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손영종은 사라진 5세대의 왕들을 찾는 방식이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반으로 삼았으니, '삼국사기'에 태조대왕이 국조왕이라고도 불렸으며, 이름은 궁 혹은 어수라고 불렸다는 기록을 눈여겨 볼 일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대왕조 에 ‘'후한서'에 안제 건광 원년(121)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 현도 태수 요광이 임금이 죽은 것을 계기로 병사를 출동하여 공격하자고 하여 모두가 찬성하였지만 상서 진충이 임금이 죽었다고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고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후일 잘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하니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사관은 이 기록과 함께 '해동고기(海東古記)'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에 즉위하였다. 나이가 일곱 살로 국모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에 이르러 왕위를 사양하여 76세의 친동생 수성에게 물려주었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고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 '한서'와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남겼다.
태조대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차대왕이 왕위에 올랐다가도 은퇴할 나이인 76세인데도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대왕 94년 7월에 수성이 ‘우리 아버지인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동생이 잇게 하기 위한 것인데. 왕은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계획을 세우라.’고 하자 미유가 ‘동생이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대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추모왕 이후 부자왕위세습 원칙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차대왕이 형이 양위를 하지 않아 반란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조대왕이 순순히 양위한 것으로 보아 차대왕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에서는 궁이 죽고 수성이 아들이라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했는데, 그 때는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이 양위를 했다고 기록한 서기 146년에 비해서 25년이나 빠른 서기 121년이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킬까를 고민했다고 할 정도로 중차대한 국가 문제로 다루었으니, 그것은 잘못 기록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후한서'의 기록대로 그 해에 고구려왕 궁이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리고 김부식은 삭감시키고자 하는 왕 중 한 사람인 국조왕을 태조대왕의 묘호와 어울리는 틈을 이용하여 혼합 기록함으로써 고구려의 존립연대를 삭감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 국조왕의 이름은 궁이었으며 국조왕이 죽고 그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태조대왕 어수로, 121년에 죽은 것은 국조왕 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국조왕의 죽음은 정상이 아니었고, 태조대왕을 추대하기 위한 모종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인 태조대왕을 즉위시킨 중심에 섰던 것이 차대왕(次大王)으로, 차기(次期) 왕의 자리를 약속받아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사용하지 않는 차대왕이라는 묘호를 썼다는 점에서도 그런 의문이 들게 한다. 그런데 자신이 나이를 먹어도 왕이 죽지 않자, 반란을 일으켜 태조대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할 기록으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차대왕조에 보면 차대왕 2년 우보 고복장을 죽이는데, 복장이 죽음에 이르러 탄식하며, ‘내가 그 때 임금의 가까운 신하로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을 보고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선왕이 내 말을 듣지 않아 이리된 것이 원통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차대왕이 반란에 의해 왕위를 찬탈한 것임을 증언한 것이다. 또한 차대왕이 반란을 준비하라고 했을 때, 앞장서서 그 명이 당연한 일이라고 했던 미유를 즉위 2년 2월에 좌보로 삼은 것이나, 즉위 3년차에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태조대왕의 큰아들 막근을 죽이자 동생 막덕은 스스로 자살한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모종의 사건으로 국조왕이 죽고 태조대왕이 즉위할 당시 수성은 이미 세자를 약속 받았고, 왕위가 부자 세습되는 중국의 관념에 의해 수성을 국조왕의 아들로 기록한 것이 '후한서'에 그대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궁의 죽음을 기록한 그 기사의 끝 부분에 태조대왕의 막내 동생이자 차대왕의 동생인 백고(伯固), 즉 신대왕 역시 차대왕이 죽고 왕위에 오르자 ‘수성(遂成)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고 아들로 기록한 것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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