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훈 칼럼> 대한유도 100년 역사적 함의, 세계를 재패한 부활의 시대로 다시 꽃을 피우다! (1)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8-03-05 11: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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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 본체는 몸의 극치이요, 도의 본체는 정신적 이치이다. 이 두 과정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유도라 한다. 유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있으니 유의 신체원리와 도의 정신적인 예의라 할 수 있다. 항상 이를 주간하는 유도수행자는 늘 겸손이 뒷받침이 돼야 한다.

「문무양도(文武兩道)」의 능력이 월등하다고 해서 상대자를 무시해서도 안 되며 실력이 부족하다고해서 의기소침해서도 안 된다. 그 만큼 유도의 본질은 심오한 것이다. 그래서 유도를 「유능제강(柔能制剛)」의 원리라고 하며 만물의 이치와 극치이다. 우리는 이를 간구하여 다시 한 번 몸으로 승화 시켜야 한다.

  즉 몸으로 승화하는 작업에서는 스승ㆍ선배 그리고 동료 및 후배들의 헌신하는 것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것이 안 되면 자기 스스로가 일침 되어 좌절의 쓴맛을 보게 된다. 이 좌절의 쓴맛을 보지 않으려면 더욱 피나는 연습과 자기 자신에 필요한 전반적인 유도의 지침서 내용을 학습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승리를 쟁취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유도인의 길[道]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1910~1945]의 강도관 유도에 도입된 일제강점기 한국유도의 발달양상에 대해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통해 다시 한 번 세계를 재패한 시대로 돌이켜 보고자 한다.

 일본 강도관유도의 성립과정을 보면 일본 유도의 창시자 가노지고로(嘉納治五郎)는 대학 시절을 통해 유학(儒學)과 서도(書道) 그리고 서양의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실리주의(實利主義)를 통해 일본 강도관 유도를 창시했다. 이는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의 초청으로 ‘유도일반 및 그 교육상의 가치’에서 강도관(講道館) 유도가 종래의 고류유술과 다른 점과 다르다. 즉 술(術)을 도(道)로 바꾸어 승부법으로서의 유도, 체육법으로서의 유도, 수심법(修心法)으로서의 유도로 정립했다.

 그러므로 1935년 강도관(講道館) 유도의 창시와 보급 및 사상의 완성 그리고 국민체력의 향상과 학교체육의 발전·국제관계의 개선해 오늘날의 강도관 유도가 발전화는 원동력이 됐다.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 설립배경을 보면 1895년 4월 17일이며 공식적으로 출범한 시기는1942년에 개조(改組)되어 새로운 무도총합단체였다.

  즉 재단법인 대일본무덕회가 탄생하였는데 일본무도의 진흥·교육·현창(顕彰 : 숨겨진 공적)을 목적으로 해 설립된 이 재단법인은 무도 관계조직을 통제하는 정부의 외곽단체였다. 특히 이 설립목적으로는 헤이안천도(平安遷都) 1100년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설립취지서에 의하면 신무(神武)천황 이래의 상무정신이었다. 이는 화혼(華婚)의 미(美), 즉 무덕(武德)을 함양하기 위하여 헤이안 신궁(平安神宮) 주변에 무덕전(武德殿)을 건립하였다. 이는 매년 무도제전을 열어 강연을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YMCA 체육과 유도의 성립과정을 보면 YMCA운동은 1899년 경성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YMCA운동을 하기 위한 건물을 세월 줄 것을 요청한 것에서 시작됐다. 이는 국제YMCA위원회는 선교사들과 조선청년들의 청원, 라이언의 현지조사보고서 등을 검토한 결과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국 YMCA의 창립을 검토하였을 뿐만 아니라 1901년 질레트는 콜로라도대학 재학중에 기독교신앙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YMCA사업에 관심을 갖도록 노력했으며 YMCA회관 건축을 위해 건축비의 모금운동을 시작하면서 조선 청년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강구했는데 1903년 3월 18일 질레트는 YMCA를 창설하는데 있어서 각 계층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YMCA창설협의회를 개최했다.

 특히 유도의 도입과정은 1929년 10월 19일 유도부 20년 기념식이 윤치호 회장의 사회로 이루어졌다”라는 원전기사내용에서 YMCA의 유도도입은 1909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택부가 언급했듯이 일제강점기 한국유도발달양상을 보면 근대화된 강도관(講道館) 유도가 우리나라에 수입됐는데 최초로 실시된 것은 1906년 황성기독교청년회부터이다. 하지만 유도가 한국에 도입된 시기에 대하여는 이제황·이홍종 그리고 일본인 아베후미오(阿部文男) 등의 다양한 주장을 했다.

 이제황은 1909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처음 실시됐다고 주장하였는데, 즉 1934년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유도는 1909년 나수영과 유근수를 초빙해 조선에 처음으로 도장을 창설했다”고 하였다. 다음은 아베후미오(阿部文男)는 1906년 명치정[오늘의 명동]에 일본식 건물의 공장을 이용해 도장을 지었다. 이는 일본인에 의해 경성에 강도관(講道館) 도장을 처음으로 개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다음은 이홍종은 1908년 유도사범을 지낸 일본의 아오야나기(青柳(他流))는 “이번에 한국 13도를 보고하고 경성에 치류 함이라 했다. 또한 그는 아베의 글을 분석하고 1906년 우찌다 료우헤이(內田良平) 도장의 창설과 더불어 유도가 전개됐다”고 주장하였음 알 수 있듯이 한국인으로서 1901년대에 이미 유도의 수련자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 유도의 한국 전래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강제점령으로 시작된 강도관(講道館) 조선지부 도장은 대한유도회의 중앙도장으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는데, 대한유도회와 연무관의 오랜 법정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이 강도관 유도에 도입된 한국유도의 발달양상에 있어서 역사적 의의와 가치가 있겠다. 이는 한국유도유입과정에 나타난 일제강점기 발달양상을 통해 현시대의 한국유도에 대한 주체사상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상무정신이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15일 YMCA회관에서 유도중추기관 결성을 위한 발기총회에서 「조선유도연맹」을 결성했다.

 이후 1947년 7월에 을지로 1가 63번지에 중앙도장과 함께 연맹사무실로 사용하지만 연맹내부의 파벌이 싸움이 심해 원활한 운영은 하지 못했다.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우리의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면서 조선체육회가 대한체육회로, 조선유도연맹이 대한유도연맹으로 명명되었다. 1950년 9.28수복과 함께 대한유도연맹과 조선연무관의 통합을 계기로 대한유도회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유도의 전성기는 1980-2000년대이다. 이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현시점에서 재조명해 대한유도의 100년사 역사적 함의가 있어야 한다. 『한국유도원』의 기록에 나타난 배경과 특성을 보면 1980년 11월 12일의 제19차 이사회에서 한국유도원 이사진 전원은 이사장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11월 19일의 제20차 이사회는 이사들의 일괄 사표 수리를 보류하고 먼저 보강시킬 후임 대상자를 물색해 좋은 묘안을 다음 이사회까지 각 이사가 구상하기로 했다.

 특히 이러한 가운데 한국유도원은 1977년의 유도회관 신축을 기점으로 하여 초창기의 중앙도장 경영이란 소박한 목적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공익법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가고 있었다.
 한국유도의 발달성장 과정을 제시해 보면 1980년 3월 27일 모스크바 올림픽 파견 제2차 선발전에서 엑스트라 라이트급 곽륜종, 하프라이트급 양산오, 라이트급 이연준, 하프미들급 박영철, 하프헤비급 조재기, 헤비급 하형주 등을 선발했으면서도 참가가 불가능하게 됐다.

 이후 제23회 로스앤젤스 올림픽에서 한국유도는 금메달 2, 은메달 2, 동메달 1개를 획득, 올림픽 참가사상 최대의 전과를 세우는 최조의 성적을 올렸다. 71kg급의 안병근, 95kg급의 하형주, 60kg의 김재엽, 65kg급이 황정오, 95kg급의 조용철 등이었다. 이 시대가 한국유도의 전성기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 다음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일본을 압도하는 종합우승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한국유도를 세계정상에 올라 갈 수 있도록 초석을 만들었다는 부정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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