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우 칼럼> 고조선과 진국(辰國; 삼한), 동·북부여, 고구려의 상관관계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제6회)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9-11-15 1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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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고조선이 소국들로 구성된 연합국이었다면 그 소국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본 칼럼과 연관이 있는 소국들을 중심으로 기록이 전하는 소국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중요한 것은 구려국이다. 북한 학자들은 구려국에 개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상서' 권11 주관 제22주서에 대한 주석에서는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구려가 서주(기원전 1066경~기원전 771년)왕실과 길이 통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구려라는 명칭의 유래가 매우 오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원 3세기 중국의 주석가 응소는 한 대의 고구려 현을 주석하여 ‘옛 구려호“라고 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전한(기원전 206~기원 24년) 때의 고구려를 그 이전에는 구려라고 불렀다는 것과 고구려 이전에 구려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구려에 뒤 이은 것이 고구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몽이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자로 성을 삼았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주몽이 자신의 성씨를 고라고 한 것과 구려 앞에 고를 붙여 국호로 삼은 것이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려국의 건국시기를 논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구려지역에서 발굴된 국내성 밑의 토성이다.

 

 국내성의 성벽은 이 토성 벽 위에 쌓은 것이며 토성의 규모도 현재의 국내성의 규모와 거의 같다. 이 토성 벽 밑에서 나온 여러 가지 석기들이 기원전 5세기의 것들이므로 국내성 밑의 토성도 이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내성의 토성은 물론 구려국 수도의 성은 아니었고 지방의 한 개 성이었으므로 수도의 성은 이보다 먼저 쌓아졌을 것이다. 따라서 구려국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5세기 이전으로 볼 수 있다.’


 북한 학자들의 이러한 이론들은 고조선이 연맹을 이루는 고대국가이기에 여러 개의 소국들이 연합했을 것이며, 그 중 하나가 구려국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조선 시대부터 존재하던 소국인 구려국이 신조선의 기반이 무너지면서 부여가 강국으로 등장했기에 부여와 연맹을 맺으며 졸본성을 근거로 한다는 의미에서 졸본부여라고 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훗날 부여의 소국이었던 구려국은 신조선의 소국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부여다. 북한의 김병룡 등은 부여의 성립 연대가 적어도 기원전 7세기 이전이라고 주장한다.

 ‘상서'에 의하면 주나라 무왕이 상(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부여를 비롯한 고대 조선 세력들이 중국과 같이 통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실린 내용으로 보면 부여라는 나라 또는 정치세력이 서주 초(기원전 11세기 경)에 이미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부여가 자리했던 자리에는 초기 비파형 단검은 물론 후기 비파형 단검까지 발견되었으며 유적과 함께 발굴된 숯에 대한 C-14년대 측정치는 기원전 7세기 이전으로 확증되었다. 이러한 문헌 및 고고학적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부여는 대체로 기원전 7세기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여가 기원전 7세기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동명왕의 부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 신조선 내에 존재하던 부여라는 소국을 이야기 한 것이라면 타당한 것이라는 견해다.

 

 그 이유는, 북한 학자들 스스로 구려국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상서' 권11 주관 제22주서에 대한 주석에서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구려가 서주(기원전 1066경~기원전 771년)왕실과 길이 통하게 되었다고 예를 들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상서'에서는 ‘해동의 여러 오랑캐인 구려, 부여, 한맥의 무리들은 무왕이 상을 깨트리고 나서 모두 길이 통하였다’고 기록함으로써 구려와 부여를 동시에 등장시켰다. 따라서 여기에서 등장하는 부여는 동명왕의 부여라기보다는 구려국이 신조선의 소국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소국으로 존재했던 부여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형'「길험편」의 ‘동명왕이 부여에 도읍하고 부여왕이 되었으므로 북이에 부여가 생긴 것’이라는 기록은, 도시의 이름과 소국의 이름이 대개 일치하던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면, 동명왕이 새로운 부여를 건국했다기 보다는 이미 신조선 내에 존재하고 있던 부여라는 소국을 점령하고 통치하여 강한 소국으로 성장시켜서 그 존재를 부각시켰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구려국이나 부여는 모두 신조선 내에 하나의 소국으로 존재하던 나라들이었으며 특히 부여는 조선이 부루족의 나라 즉, 부여라는 점에서 더더욱 부각 될 수 있던 것이라는 관점이 옳다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고조선이 소국들로 이루어진 삼조선, 즉 신·불·말조선의 연합국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동명왕이 탁리국에서 왔다고 했으니 탁리국 등의 소국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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