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훈 칼럼> 임진왜란과 일본 가게류(陰流)의 검술을 통해본 우리 민족의 뼈아픔 역사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9-05-10 14: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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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류(陰流)의 검술은 일본 최고의 검법이다. 제일 먼저 부동심의 검술 극의인 이치를 언급한 유파이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검(劍)이다. 임진왜란 시기 이전 명나라은 일본 왜구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戚継光)(1528~1587)은 신유진상(辛酉陣上)에서 《影目録》을 소장하게 되어 일본 검술 병법을 연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紀効新書》를 걸쳐 모원의 《武備志》에 일본 왜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옛 부터 알려져 있어 유실(流失)한 검법이 존재한다. 물론 이 시대 검술의 다른 유파에서도 검술 병법의 신체기법체계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유파에 비해 마음의 검인 부동심의 극의인 이치를 매우 강조한다. 즉 가게류(陰流)는 신체기법과 마음의 심법을 중요시 했다.


 가게류(陰流)의 발생된 시기는 약 1490년대로 추정되며 시조는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愛洲移香斎久忠)(1452~1538)이다. 그는 오랜 세월 속에서 실전이라는 체험을 통해 마음에 검을 느끼게 된다. 그는 신체기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중요성을 느껴 그는 가게류(陰流)를 창안하여 일본 사무라이의 검술계를 평정한다.


 또 이러한 이치는 일본 검도계에서도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즉 일본 검도에서는 검을 다루는 크게 양(陽)과 음(陰)으로 구분하여 말한다. 양(陽)의 검은 밖으로 보이는 신체기법이나 움직임의 자세인 자연체이며 음(陰)의 검은 그에 대비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세 자연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가 검으로 신체의 어떠한 부분을 공격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언제나 상대에 따라 변화하며 자신의 모습을 부드럽게(和) 변화시키는 극의의 이치이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기선 싸움에서 상대를 기선으로 제압하는 신체기법이 양(陰)의 병법이다. 이는 진정한 음(陰)의 정신은 적을 베지도 않고 적을 포박하지도 않고 적에게 승리하지도 않으며 적에게 패배하지도 않는 것이 절대의 병법이다. 고로 가게류(陰流) 검술 유파가 제일 중요시 한 것은 부드러운(和) 것에 마음의 자연체인 신체기법의 병법이다.


 이러한 그는 다이묘 기타바타케 가문을 섬기는 호족의 후손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도검의 도(道)에 능통하여 무사수행(武士修行)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규슈 휴우가 지방에 들어가서는 우도라는 곳의 암석 위에서 좌선 무사수행을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는 수행 끝에 그는 영몽(靈夢)을 꾸었는데 꿈에서 원숭이의 모습을 한 신이 그에게 검의 신기를 전수했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아이스의 무용담이며 원숭이 동작을 통해 터득하여 그전의 검술의 병법과 융합하여 만들어졌다고 판단되며 아무튼 그들은 원숭이의 신이 전한 기술이라 해서 가게류(陰流)를 엔삐가게류(猿飛陰流)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가게류(陰流)의 병법전서 기록을 보면 원숭이 모습을 한 무사에 의해 펼쳐지는 신체기법들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가 구마노(熊野)의 수군과 함께 중국 해안에 와코로 건너간 적도 있었다고 하나 일본 측 사료에서는 전혀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제일 중요시 한 것이 있다.

 

 그때 당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일본은 명나라와 조선 해안을 수십 차례 침략했으며 이로 인해 임진왜란이 발생하게 된다. 이 시기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우리 민족은 뼈아픔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만큼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특히 그때 당시 중국 동부 연안에는 일본의 왜적이 자주 출물 했다. 그들은 중국의 병사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검술을 사용했다. 그들은 일격필살의 검으로 사람을 두 동강 내는 병법을 사용한다. 그들의 병법은 무시무시하고 괴상한 비명의 기합을 지르며 상대를 향해 돌진하고 적의 바로 앞에서 뛰어오르며 온몸을 내던져 상대를 베는 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체기법이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일격필살의 검술 공격에 조선인과 명나라 병사들에게 공포와 동시에 일본의 검술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그에 따른 병법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어,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하게 된 원동력이 된다. 이 기록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亂中日記》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 왜적들의 검술 병법이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愛洲移香斎久忠)의 가게류(陰流) 원숭이 가게류(陰流) 엔삐가게류(猿飛陰流)였다고 생각된다. 그때 당시 그가 창시한 가게류(陰流) 검술 병법인 전서 이외에는 없었다.


 일본 검술 유파인 가게류는 세밀하고 정교한 신토류에 반하여 강하고 직선적인 정면으로 공격하는 검이다. 상대를 들어볼 때 뛰어오르며 자신의 몸을 검과 하나로 하여 입신으로 던지는 검술의 병법이다. 가게류(陰流)의 병법은 '사루마와리(猿回)'가 있다. 즉 상대와 자신의 검이 맞대었을 때는 반드시 뛰어오른 것을 가르친다.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愛洲移香斎久忠)의 후계자인 제2대 가게류 소오케(宗家)가 된 켄코오사이는 히다치 지방으로 이주한다. 그곳의 호족 사타케(佐竹) 가문 검술병법의 사범이 된다. 그 후에 신가게류(新陰流)를 창시한 가미이즈미 노부쓰나는 신토류의 지도를 받는 후 히다치 지방으로 와서 이 켄코사이 제자가 되어 가게류(陰流)를 전승되며 일본 제국주의 실전적 및 상징적 존재가 된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많은 관계가 있는 검술 유파이기에 많은 연구가 더욱 필요하며 다시는 지난 과거 뼈아픔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검술과 전장격투유술의 무도는 상무적 기풍을 의미하기에 역사 속에서 교훈이 있듯이 지금도 일본은 중학교부터 무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무예교육을 반드시 중요시해야 하며 과거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의 암흑기를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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