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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서구 민주주의 혁명에서 전제군주의 조세 횡포에 대항한 시민(부르주아지) 계층의 슬로건이자 시민혁명의 명분이었다. 쉽게 말해서 군주가 과세하려면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슬로건이 조세법률주의 역사적 원리가 된다고 설명하고 우리는 배우고 있다. 그러나 조세법률주의와 의회(대표) 동의를 직접적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입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 입장은 하나만 강조하고 둘은 숨기는 반민주적 의도가 숨어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조세법은 딱 한 번만 의회를 통과하면 법률이 되고 영구적으로 국가가 국민에게 강제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조세법률주의는 국가가 국민에게 영원히 강제로 세금이란 굴레를 씌워도 좋다는 논리이다.
그렇지만 “대표 없는 과세 없다”라는 슬로건은 조세법률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군주가 국민에게 세금을 거두려면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를 의회에서 명확히 밝혀서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산을 심의하고 그 필요에 따라 조세의 종목과 세율을 정하자는 것이다.
지금도 서구와 미국에서는 예산과 조세는 반드시 함께 묶어서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국가 재정을 계획, 토론, 의결, 집행, 회계감사가 의회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의회 통제를 받는다는 의미는 곧 법률이라는 의미이다. 의회는 매년 예산법을 제정하고, 정부는 예산을 법대로 집행하며, 그에 대한 회계감사는 다시 의회에서 이루어진다.
예산법을 정할 때 예산의 규모에 따라 조세법을 제정·개정하고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그 법을 토대로 공무원이 예산에 대해 부정을 하면 사법부에서 조사하고 재판하고 처벌한다. 그래야만 국민도 탈세를 도모하지 않고 정당하게 세금을 내는 것이다.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쓰이는지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만약 세금의 사용(예산의 지출)에 대해 의문이 있거나 부정이 있다고 판단하면, 납세자 소송으로도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예산법도 아니고 예산과 조세가 분리되어 있다. 조세는 조세법률주의에 따라 영구조세주의로 운영되고 예산은 법이 아니므로 정부의 재량 범위가 넓다. 이러한 재정체제 아래서는 정부가 그냥 강제로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둬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더구나 조세법률주의에 의해 납세자 소송이 부정되고 있으므로 국민은 단지 세금만 내야하고 그에 대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이러한 비민주적 재정제도는 왜 일본과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일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 제도를 고안했다는 것은 지난 칼럼에 이미 언급했다. 이토는 메이지헙법 제정을 간여할 때에 가장 심혈을 쏟은 것이 이러한 재정제도였다. 그 이유는 의회의 간섭 없이 일제의 군사적 확장, 즉 군국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재정에서 군비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에 대한 의회의 간섭은 쓸데없는 논쟁을 가중하고 천황의 군대가 아시아 침략을 위한 군국주의 확장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영구조세법률주의와 예산과 조세의 분리, 예산의 비법률화가 필요했다.
이 제도에서 행정부는 의회 간섭 없이 자유롭게 예산을 쓸 수 있는 구조가 된다. 그러나 이토의 바람대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패권을 잡았지만, 의회의 통제에 벗어난 군대의 폭주는 결과적으로 일제의 패망을 가져왔고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이토의 재정제도에 익숙한 한국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비판 없이 영구조세법률주의와 예산의 비법률주의를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다. 따라서 재정제도에서 국회의 역할은 축소·왜곡되어 있으므로 “일하지 않는 국회”가 되어 있다. 국회의원은 국가의 금전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정치의 재미가 반감하지만, “쪽지예산”에 길든 자신들이 허수아비란 사실도 모른다.
조규상 박사(통일한국재정정책연구소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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