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훈 칼럼> 조선의 르네상스시대, 정조대왕 무예관을 묻다(2)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7-10-18 15: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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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 광복이후 대한민국 역대 정부의 권력자와 직권정당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에 위한 정치를 한 정당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정치적 수단으로 당리당략(黨利黨略) 직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을 가지고 국익과 수많은 사람들을 피해를 준 권력자와 조력자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과거 조선시대도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을 가지고 행사한 왕도 있었으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통해 모든 분야, 즉 정치, 군사, 문화, 무예, 예술, 학문, 경제 등 발전시킨 왕들은 우리 역사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조선 500년 왕조에 있어서 제일 으뜸을 꼽자면 우리는 주저 없이 정조이다. 그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적폐청산의 당면과제에 대해 어떠한 시사점을 주고 있으며 또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일생을 통해 사상과 업적 그리고 본인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왕국은 무엇이었는가를 이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다. 정조 원래 이름은 산이고 자는 형운이며 호는 홍재이다. 영조(1694~1776)의 손자로 아버지는 사도세자(1735∼1762)로 우리에게 알려진 장헌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1713∼1778)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그는 8세 되던 해 영조 35년(1759년)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1762년 2월 좌참찬 김시묵(1722∼1772)의 딸 효의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해 5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9일 만에 죽는 광경을 두 눈으로 이를 목격을 해야만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린 정조의 가슴에 크나 큰 상처가 된다.

 

 이는 조선 500년 왕조에 있어서 아버지가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골육상잔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13년 동안 무예지 상무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다스리면서 수많은 생각을 하고 또 고뇌 속에서 평상심시도를 가졌다.

 
 그 이유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죽음에서의 충격과 탐관오리 등의 중상모략에도 그는 참고 또 참아야만 했다. 1775년 12월 영조가 노병이 깊어져 죽음이 임박해 지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하지만 영조의 조력자 홍인한(1722~1776)과 정후겸(1749∼1776) 등이 방해를 하여 조정이 초긴장했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화완옹주의 소생으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됐다. 그들은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시강원의 궁료 홍국영(1748∼1781)과 정민시(1745∼1800) 등을 참소하려고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다음 해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를 승계하는 정조 그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을 혜경궁으로,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1719∼1728)도 진종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으로 격을 높였다.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하고 경모궁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정통성을 확고히 확립한 뒤 홍인한과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적폐청산의 “명의록(明義錄)”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혀 수록했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 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칠 준비를 다졌다. 세손 때부터 시강원 설서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했다.


 그러나 1779년 홍국영의 누이 원빈이 갑자기 사망하자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삭탈관직을 명하고, 정사를 직접 주관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홍복영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왕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을 호위무사로 편입 뒤 장용위를 설치하여 지도력과 통솔력을 발휘했다.


 또한 정조는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는 규장각을 통해 그가 직접 모든 것을 관장하여 불필요한 과거제도를 폐지했으며, 만년에는 각도에서 행해지는 소과제도를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로 명명했다. 빈흥과는 정조가 직접 과거 시험문제를 출제하여 이 문제를 규장각신이 가지고 과거시험장에 내려가 시험지를 개봉하고 과거 시험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정조의 주관 아래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했다.

 

 무과에서도 몇 차례 경과를 통해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면서 “병학통”, “무예도보통지” 등의 정예병 양성에 필요한 병서들을 편찬하여 널리 보급했다. 융정으로는 기존 5군영보다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고, 서해의 해방을 위해 교동의 통어영과 강화도 경영에 힘썼다.


 특히 우리 역사상 위대한 군사무예서적 “무예도보통지”를 1790년에 발간을 했다. “무예도보통지”는 규장각의 각신인 박제가(1750~1805), 이덕무 (1741~1793), 장용영의 초관인 백동수(1743~1816) 등이 정조의 지시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 고서에는 조선중기 선조 31년(1598) 한교가 편찬한 무예 6가지로 구성한 “무예제보”와 영조 35년(1759)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무예 18기 기법을 가지고 편찬한 “무예신보” 및 한, 중, 일 삼국의 군사무예서 145권을 탐구해 편찬된 군사무예서적이다.

 

 즉 “무예도보통지” 머리말에 정조의 서문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이래 전쟁 기술의 대강과 한교 등의 서적을 바탕으로 마련한 인물들의 간단한 전기와 관계 사실들을 서술했다.

 

 정조의 이러한 원천에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란을 통해 얻는 교훈이 있었다. 또 그에게 이러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그의 부친 사도세자이었을 것이고, 또한 인물이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 사도세자는 “무예신보”를 편찬했다.

 

 그는 유년기 시절부터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는 무예 18기란 이름이 사도세자로 인하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서문에서는 그동안 선진후기를 주장하던 기존의 병서에 반하여 단병무예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각 개인이 익힐 수 있는 24반 무예가 실려 있는 “무예도보통지”의 장용영 무사중심으로 널리 보급되어 기틀을 마련했다.


 정조 그는 부친 사도세자의 존경심과 효심 또한 대단했다. 효도의 유교윤리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행궁과 화성건립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다음해 1795년 2월 어머니인 혜경궁홍씨와 함께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에 성묘하고, 혜경궁께 진찬례를 베풀었다. 즉위 20년이 되는 다음해 1796년 화성 성을 완공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정조에 있어서 충무공 이순신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면서도 그가 닮고 싶은 무인이었다. 그 이유는 조선의 절대절명 위기 속에서 무예지의 상무를 통해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으며, 삶 또한 자기 자신과 같아서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충무공 이순신 “난중일기”의 필사본 임진일기, 계사, 일기갑오년, 병신일기, 정유일기, 정유, 일기무술, 이상 7권의 진본을 가지고 충무공 이순신의 전기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게 된다.

 

 정조 그는 학문이 깊고 시문에 능통했으며, 서화에도 일가를 이룬다. 그의 그림은 전하는 것이 매우 적으며, 필파초도와 필국화도 두 작품이다. 특히 정조는 <문무겸전>을 통해 인재양성에 있어서 덕성의 함양, 그리고 왕권의 강화 및 국가안위를 위하여 문의 규장각 및 무의 장용영을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군사적 무예문화의 서적 중에 제일 으뜸인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했다. 그는 문무겸전이라 하는 문과 무의 도를 겸비한 조화로운 전인 인간상을 심어주기 위해 문무백관들에게 직접 궁술 시연 및 지도를 했다. 그러나 정조는 49세 나이에 병으로 서거하고 만다.

 

 만약 정조가 이 나이에 일생을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문의 규장각과 무의 장용영이 더욱 발전하여 조선이라는 나라가 한, 중, 일 삼국 중에서 가장 거대한 왕국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 정조가 이루고자 하였던 그 꿈을 다시 부활하여 오늘날 대한민국 권력자와 직권정당 및 여야는 적폐청산을 통해 국익과 국민을 위한 정치로, 새로운 글로벌시대로 나아가야 할 때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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