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훈 칼럼> 신라 <화랑세기>의 상무정신과 일본 무사도(2)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8-06-15 10: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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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견된 『화랑세기』를 중심으로 하여 화랑정신이 어떻게 성립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랑세기에서 격검, 무도, 검도 문헌이 보인다. 화랑의 무리들은 무도와 선도를 닦았다. 무도를 연마함으로서 자신을 지켰으며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를 쟁취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선도는 가무가 포함되는 일종의 제사를 집행하는 학문이었다. 화랑정신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문노’는 격검으로 인격을 닦았으며 그에게서 검을 배운 화랑들에 의해 삼국통일의 기틀이 마련했다(이진수, 동양무도연구, 한양대 출판부, 2004).


 화랑도는 화랑들의 모든 행동의 초석이 됐다. 제례의 경건함을 체득하는 것이 화랑정신을 획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 경건함을 바탕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친구와는 믿음으로 사귄다는 ‘화랑정신’이 태어난 것이다. 우리 역시 현대의 무도에서 폭력적 용감성에 앞서 그들과 같이 신체의 경건성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무도 수련을 통해 어떻게 신체의 경건성을 체득하였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학검사상은 검술을 배우려는 마음이요, 배운 몸이다. 검을 배운다는 것은 지신을 지키고 친구를 지키고 나아가 국가를 지키려는 마음이다. 화랑세기에서 격검으로 가장 이름이 높은 화랑은 앞서 언급한 ‘문노’였다. 이종욱은 문노를 화랑정신의 전형이라 높이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화랑정신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다(이종욱(1999), 화랑세기, 신라인의 신라이야기. 서울, 소나무).


 문노의 이 같은 화랑정신은 어떻게 양성한 것인가! 그에 배움에 대한 기록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격검’이다. 화랑세기는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 하였고(호국무사로서의 호탕한 기질, 의리를 중시하는 의인의 풍모, 굳은 지조와 결백한 인격, 높은 기품, 자발적인 전쟁 참여. 상벌에 초연한 태도, 아랫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함, 왕을 폐위하거나 반란 진압에 앞장서는 적극적인 자세. 원만한 부부관계), 의기를 좋아했다(公自幼善擊劍, 好義氣)라고 보인다’라고 말하고 있다(이종욱, 1999). 어려서부터 검술을 잘 했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에게 검술을 배웠다는 것인데, 그 사승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진 것이 없다(이진수, 2004).


 화랑이 신라 사회의 제도권에 합류하기 이전, 다시 말해 화랑이란 이름이 역사에 나타나기 이전에 화랑은 선의 무리 즉 선도였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선이란 한자의 의미는 신선 혹은 산에 사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한자가 주는 의미 그대로 이 용어가 화랑세기에서 사용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선의 무리가 하는 일은 신을 받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신은 어떤 신이었을까!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행했다고 하였으니 나라를 세운 시조가 제 일급의 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산신을 숭배하여 모인 무리들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신을 모시는 신궁이 생겼고 덩달아 이것을 지켜야 할 필요가 발생했다. 이에 방어수단으로 격검술이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일본의 검술이 신사에서 발생한 것과 상통한다(中林信二(1994), 武道のすすめ. 東京, 島津書房).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검술 유파의 기원을 그들의 신화에 근거하여 천조대신 혹은 국민적 영웅인 미나모도 요시쯔네(源義經)에 두기도 한다. 유파를 세운 시조들은 한 결 같이 신사에 참배하거나 산신에게 빌어 검의 비술을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검에 주술적이고도 종교적인 요소가 가미된 그 자체가 바로 생명과 직결되는 무예이었다. 검에 자신의 생명을 건 검사로서 신이나 부처 등의 신비한 힘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가케류(影流)의 시조 아이슈(愛州移香)는 16세 때의 어느 달 밝은 밤에 신이 원숭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검법을 전수했다고도 한다. 아이슈의 검법은 우리의 《武藝圖譜通志》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이진수, 2004).

 
 화랑은 아니었지만 원광대사로부터 《世俗五戒》를 받은 ‘귀산’과 ‘추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귀산은 사량부 사람으로 아버지는 무은 아간이다. 어려서 같은 부에 사는 추항과 친구가 됐다. 두 사람이 서로 다짐했다. “불가의 계률에 보살계라는 것이 있어 10가지로 구별되나 그대들은 남의 신하로서 이를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세속에 5가지의 계율이 있는데 그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事君以忠), 둘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이다(事親以孝). 셋째는 벗을 신의로써 사귀는 것이요(交友以信), 넷째는 전장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며(臨戰無退) 다섯째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것이다(殺生有擇). 그대들은 이것을 지켜 소홀하게 하지 마라.”

 

 우리가 사군자들과 교제할 것을 생각하면 먼저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창피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 도를 묻지 않겠는가(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盖聞道於賢者之側乎)! 당시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거실사에 기거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은 그 문하로 찾아가 옷자락을 여미고 공손히 말했다. “속세의 선비가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내리셔서 일생의 훈계로 삼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화랑은 <신궁의 대제>를 담당하였던 <선>의 무리였다(花郞者仙徒也. 我國奉神宮, 行大祭于天). 국가의 제사를 주관한 것이 바로 화랑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해 화랑의 순국정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것을 이종욱은 ‘만들어진 화랑상’이라 비판했다. 화랑이 신궁의 제사를 담당한 선도들이었음이 화랑세기에 의해 새로이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영주 혹은 영지에만 목숨을 건 일본 무도와는 그 본질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제까지 화랑도의 연구자로 잘 알려진 일본인 학자-미시나(三品), 이께우치(池內) 등 들은 화랑을 일본식으로 파악하고 화랑을 무사정신에 투철한 전사로 비유하였다. 지금까지 국가적인 제사를 담당한 사제로서의 화랑을 연구한 학자는 전무했다(이진수, 2004).


 그렇다면 화랑이 사제로 있던 신궁은 어떤 곳인가! 신궁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제 21대 소지왕 9년(487)의 기록에서 나타나며, 소지왕 17년에 왕이 친히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궁은 신라의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왕권강화가 이루어진 시기에 설치됐다. 최광식은 천지신을 모신 신궁의 설치는 대내적으로 국가체제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정책이며 대외적으로는 국력의 신장에 따른 국가 의식의 자주적 표현이라 주장했다.

 
 그렇다면 신궁이 설치되기 이전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신궁이 설치되기 이전의 한반도는 귀신을 섬기는 부락 국가 시대였다. 각 부락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고 사제가 있었으니 곰을 섬기는 부족이 있는가 하면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도 있었다. 각 부족들은 자신의 주신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소속 부락을 보호하는 부락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소도>에 관한 기록은 소도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무사의 무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信鬼神, 國邑各立一人, 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謂蘇塗, 立大木縣鈴鼓, 事鬼神, 諸亡逃之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而所行善惡有異).

 손진태는 주에 보이는 ‘호작적(好作賊)’을 ‘각 부락 간의 적대심’으로만 한정지어 풀이하고 있지만(손진태(1984), 民俗學論考. 서울, 대광문화사). 이는 자기 경계에 대한 각 부락민의 수호 의지가 있었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당시 무장 세력이 존재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진수, 2004).


 선도라는 용어가 중국의 신선과는 달라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던 집단이었음은 화랑이 일본적 무사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그 기원이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의 무사가 자신의 토지 혹은 그 땅을 준 영주에 충성하는 차원에서 출발했다면 화랑의 그것은 귀신에 대한 제사로부터 그것이 시작됨으로서 그 정신적 측면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귀’는 죽은 사람의 혼령을, ‘신’은 자연신을 포괄해서 신명이란 의미를 갖는다.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는 효의 지속적 표현이므로 인간의 인격형성에 도움을 준다(金勝惠, 1994).

 
 신을 섬기기 위해서는 경건한 몸과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논어’에는 공자의 제사 참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공자는 제사 지내기 위한 준비인 재계를 대단히 중시했다. 재계는 마음과 몸을 가지런히 하고 몸을 깨끗이 하며, 또 부정한 일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 화랑도들의 심신수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재계’였다(이진수, 2004).

 
 김유신은 그의 두 번의 입산수행, 방술의 비결을 받은 중악에서 그리고 검술을 수련하기 위해 들어간 인박산에서도 가장 먼저 행한 것이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는 것이었다. 향을 사르고 하늘에 고했다(燒香告天)라’ 하였으니 이는 마음을 다하여 제단을 차렸음을 의미한다. 검술을 수련하는데 재계가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김유신이 방술의 비결을 받을 때에도 재계하였음을 보면 이 재계가 화랑의 인격 수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으며 단독 입산하여 재계하는 것은 화랑 수행의 한 가지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연재한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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