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우 칼럼> 고구려 건국연대는 기원전 217년이다(제2회)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9-04-15 10: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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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고구려 건국연대 소급을 주장하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광개토경평안호태왕 능비에 광개토태왕이 추모왕의 17세손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에는 13세손(혹은 12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세손 삭감에 의한 역대 왕의 삭감으로 고구려 역사를 축소시킨 직접적인 시도임으로 고구려 건국연대가 앞당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소위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 적혀있다고 하는 ‘유국(有國)900년’설이다. 이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 “당나라 군사가 부여성을 점령하고 부여주 40여 개의 성이 모두 항복하겠다고 했을 때, 당 고종의 임무를 받고 요동에서 귀국한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에게 고종이 군 내부사정을 묻자 가언충이 승리를 다짐하는 발언 중에 ‘고구려비기에는 9백년이 되지 못하여 마땅히 80대장이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나라 때 나라를 세운지 9백년이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전쟁을 위해서 나름대로 많은 연구를 통해 준비했을 적군의 장수가, 고구려가 건국 된지 900년이 되었다는 것을 밝혀준 것으로, 고구려가 멸망하던 668년(건국 후 705년)에 나온 말이니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200여년은 앞당겨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한 무제가 한사군을 세울 때 ‘고구려현(縣)’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물론 이 문제는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삼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고구려라는 이름을 차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위여부를 가려야 할 문제다. 하지만 한 무제가 고구려현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 때 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고구려의 건국은 한사군이 만들어진 기원전 108년 이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대표적인 근거를 들어서 신채호는 이미 1931년에 '조선상고사'를 통해서, 한나라의 조선 침략 이전에 고구려가 존재했으며 고구려의 역사는 적어도 백 수 십년은 삭감되었음을 밝혔다. 임승국 역시 신채호와 비슷한 예를 들어서 고구려 건국 연대의 오류를 지적하며 고구려의 건국은 200여년 앞당겨져야 한다고 했다.


 한편 북한의 손영종은 1990년 「고구려 건국년대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맨 끝 부분의 ‘사론’에 ‘고구려는 진(BC 221∼BC 206)ㆍ한(B.C. 206∼A.D. 220)시대 이후로 중국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라고 지적되어 있다. 진나라는 기원전 9세기말~8세기 초에 세워진 나라였지만, 그것은 주나라의 한 개 제후국이었을 뿐, 진나라가 조선과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진시황이 중국대륙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기원전 221년경에 진나라는 고조선과 경계하게 되었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진나라는 조선과의 사이에 상장·하장이라는 방어시설을 두고 상장·하장 사이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공지로 만들어 완충지대로 삼았다. 이 무렵에 진나라의 동쪽 경계는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완충지대는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하여 처음 발을 붙였으며, 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제후국 책봉을 받았던 지역으로 오늘의 요하 하류 서쪽에 해당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동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진나라로서도 동북방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진나라와 기원전 221년경에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몇 년 후에는 직접적인 경계를 가진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는 기원전 221년 전·후로 큰 나라로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것은 고구려가 이미 오래전에 나라를 세우고 강화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나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앞에서 다른 학자들이 인용했던 '삼국사기'의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지 이제 9백년이 된다.”라는 기록을 인용하여 고구려는 한나라 때는 이미 건국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 능비에 광개토태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는 12세손이라고 했다.’는 점을 고구려 역사 축소의 증거로 들었다. 이것은 신채호의 13세손과 1세가 차이가 나지만, 그것은 시조 추모왕을 포함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흔히 세손을 따질 때 시조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세손을 계산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손영종은 “'가락국기'에서 보는 것처럼 제2대부터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라 5세가 누락이 되었다고 본다.”고 하면서 기록을 통해서 그것들을 찾아내었다고 했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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