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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신해혁명을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성공시킨 일본은 만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전폭적인 투자를 했다. 1920년대에 만주에 투자된 외국 자본 중에 약 70%에 해당하는 것이 일본 자본이었다. 물론 이 투자가 만주철도를 건설함으로써 이미 일본 제국주의가 병탄한 대한제국을 기지로 삼아 중국대륙과의 전쟁을 수월하게 하자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과 전쟁을 하는 자체가 전쟁을 종식할 때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만주를 수중에 넣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만주에 대한 욕심은 장쭤린(張作霖)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장쭤린은 청일전쟁에 참여하여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망하자 고향인 봉천성(奉天省)으로 돌아가서 자위부대를 조직하고 그 세력이 점점 커지자 동북3성을 독자적으로 지배하였고, 동북 3성을 독립정부처럼 운영하는가 하면 베이징까지 진출하여 1926년에는 베이징에서 대원수직에 취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1927년 통일 중국이라는 기치아래 북으로 진격해오는 장제스의 국부군에 눌려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를 지원하던 일본 정부는 장쭤린에게 베이징을 국민당에 넘겨주고 퇴각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결국 장쭤린은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퇴각을 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이 장쭤린에게 퇴각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장쭤린은 그 지시에 따랐다는 것이다. 결국 장쭤린은 일본에 의해 그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일본은 그 목적이 만주에 있었던 것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로는, 앞서 기술한 신해혁명을 도야마 미쓰루의 우익단체인 겐요샤를 통해서 지원한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즉 어떤 단체가 아니라 일본이 직접 드러내 놓고 지원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본의 노력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 사건도 있다. 괴뢰 군벌을 두는 것보다는 직접 만주 지배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관동군 참모들이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천진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타고 오던 기차를 폭파하여 그를 암살한 것이다.
일본 역사는 이 사건이 일본 정부의 계획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장쭤린을 암살한 관동군 참모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았다는 것을 볼 때, 그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엄격한 일본군율을 참고로 할 때, 만일 일부 관동군 참모들에 의해 본국의 의도와 전혀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들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장쭤린의 임무는 동북3성을 장악하고 화북지방으로 영역을 넓히는 계획을 시험하는 것까지가 전부였던 것이고,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퇴각하는 그를 일본이 관동군 참모들을 내세워 계획적으로 제거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쭤린보다는 정통성이 있는 사람을 내세워 만주를 통치하는 것이 일본의 입장에서는 더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만주국의 건국이다.
장쭤린의 암살로 인해서 그의 아들 장쉐량이 그 지위를 계승하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반감으로 장쉐린(張學良)이 국민당 정부에 합류하자 일본의 만주 정복 전략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절대 만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철도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그 사건이 장쉐량 지휘하의 중국군에 의한 소행이라고 몰아붙이며 관동군이 만주 침략을 개시했다.
1931년 10월 요녕성(遼寧省) 서부에 있는 도시 금주(錦州)를 폭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북3성 전역을 장악하고 1932년 장쉐량의 거점인 금주와 하얼빈을 점령하여 만주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한 후, 같은 해 11월에 천진(天津)에 망명 중이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부의(愛新覚羅溥儀)를 탈출시켜 만주국의 황제로 삼을 준비를 추진하였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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